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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Y 17 재일조선학교 역사
    New Korea를 위한 21일 기도 2022. 8. 27. 21:39

    재일동포역사의시작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강제노역과 유학, 생계를 위해 일본에 거주했던 조선인은 200만 명이 넘었다. 해방과 더불어 많은 수가 귀국했지만, 상당수는 일본에 남았다. 가지고 갈 수 있는 금액을 일본 정부가 1,000엔 이내로 제한 한 것이다. 그 당시 현금 1,000엔이라고 해봐야 쌀 한 가마 니도 못 사는 돈으로, 가난했던 대부분 조선인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사 람들에게는 어렵게 모은 재산을 포기해야 했고, 조선으로 돌아간다 해도 생활 터전을 마련할 수 없었기에 섣불리 떠날 수 없었다. 더욱이 그 당시 조선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했고 강제노역으로, 먹고 살기 위해 일본 전역으로 흩어진 이산가족들은 혈육을 찾기 전까지 떠날 수 없 었다. 결국, 60만 명이 남았다. 이것이 아픈 재일 조선 역사의 시작이다.

     

    재일조선학교와4.24교육투쟁

     

    일제 식민지에서 강제로 이름과 글을 빼앗겼지만, 아이들을 위해선 언어와 민족 교육을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일본 패망 후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자는 돈으로, 힘 있는 자 는 힘으로, 지식이 있는 자는 지식으로’라는 구호하에 일 본 전역에 600여 개의 ‘민족학교’(초기 국어강습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48년 1월 일본점령 연합군사령부(GHQ)가 일본교육실정법 위반이라는 명분으로 전국에 있는 민족 학교에 폐쇄 명령을 내린다. 

     전국 각지에 경찰과 군대가 동원되자 이런 폭거에 분노한 재일동포는 민족학교를 사수하려고 모이게 된다. (고베(神戶)와 오사카(大阪)에서는 일본 패전 후 최대의 대중 운동으로 기록되어, 그 시기와 장소를 상징하여 ‘4·24 한신(阪神) 교육 투쟁’이라 한다). 24일, 약 일만 명 동포들이 학교 폐쇄 철회 등 다섯가지 요구 상황을 들고 효고 청사앞에 집결했는데 고베 군사정권은 돌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732명을 무차별 강제 체포, 연행했다. 이때 시위대를 향한 발포로 인해 수백 명이 중경상을 입고, 선두에 있던 열여섯, 김태일 소년이 총탄에 맞아 숨지고 만다. 소년 김태일은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일곱 형제를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조선학교를 지켜라!” 부르짖으며 시위의 선봉에 섰다가 결국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열여섯 살 공장 직공이 지켜내려고 했던 ‘조선교육’. GHQ가 재일조선인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다는 것이 너무나 큰 아쉬움으로 남는 대목이 아닐수없다. 조선학교사업은 가난한 재일조선인에게버거운 일이었고 창문도,책상도, 교과서도 변변히 없는 학교였다. 일찍이 재일조선인을 ‘해외 공민’으로 인정한 북한은 1957년 ‘교육원조비와 장학금 1억엔’ 및 교과서 등으로 민족교육을 지원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재일 동포의 민족 교육을 철저히 외 면해 왔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조선학교가 북한을 ‘진정한 조국’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 일본과 북한은 ‘수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북한국적’을 가질 수 없다. 다만 해외에 나갈 때 임시 여권을 발급받을 수는 있다) 2020년 조선학교는 일본 전국에 60개교가 남아 있고, 초기 4만여 명에 달하던 조선 학생은 약 7,0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일본 교육법에 준하는 ‘각종학교’(1조교, 전수학교의 다음)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학교의 재정은 전적으로 학생 수업료와 동 포들의 기부로 꾸려지고 있다. 북한으로부터 재정 지원은 계속되고 있으나 매년 1억엔 정도로서 현재 가치로는 ‘교과서’ 제작과 인쇄에 그친다. 최근 줄어드는 학생 수와 ‘일본 정부의 제도적 차별’ 등 많은 요인이 겹쳐 학교 재정은 악화일로에 놓여있다. 수업 내용은 국어, 역사, 사회 등 일부 민족교육 정통성 유지를 위한 수업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일본 학교와 유사하고 ‘일본어’ 수업을 제외하면 모두 ‘우리말’로 진행된다.

     일본정부의차별과교토조선제1초급학교습격사건

    일본 학생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정기할인권을 조선학교학생 은 1994년이 되어서야 받을 수 있었고, 일본 고교 스포츠 공식 대회에도 96년에 참가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조선학교는 정식 가맹이 아니라 준 가맹의 처지에 놓여 있다. 2009년 ‘재일의 특권을 허락하지 않는 시민모임’(이하 재특회:극우단체) 회원들이 교토 조선 제1초(등)급학교 정문으로 몰려와 “조선인은 일본에서 나가라.”, “스파이의 자식들” 등 혐오발언을 내뱉으며 소동을 일으켰다. 당시 수업중이던 어린 학생들은 재특회의  성기를 통해 무서운 욕설과 폭언들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이 외에도 조선학교에 대한 일본정부 및 민간의 차별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치마저고리 칼질 사건’이다.

     1989년 KAL기 폭파사건, 1994년 미사일 위기, 2002 년 납치문제 등 때마다 통학하던 어린 여학생들의 치마저고리는 칼에 찢겼고 아무 이유없이 폭행을 당했다. 학교에는 상시로 학생들을 ‘위해’ 하겠다는 협박 전화가 걸려오고, 심할때는 학생들의 통학 버스에 쓰여있는 ‘조선학교’라는 글씨조차 테이프로 붙여 보이지 않게 할 정도였다. 조선학교에는 기부해도 세금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없으며, 학교 앞 어린이 보호구역도 설치해 주지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때 마스크 지급 역시 조선학교만 제외되었다. 이렇게 민간에서 저지르는 위협 행위를 방조하고 거드는 것이 바로 일본정부의 ‘법적, 제도적 차별 행위’이다.

     

     

    기도제목

     

    1. 재일조선인 기독교 비율은 통계가 없을 정도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을 위해 섬기는 사역자도 극소수이다. 재일조선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 도록 기도하자.  신앙생활하고 있는 재일조선인들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2. 남쪽에서 외면받고, 북쪽에서 이용당하고, 일본에서 차별받으며,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어쩌면 아직도 해방되지 못한 삶을 사는 재일조선인들을 치유해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길 기도하자.
    3. 학창시절 수학여행을 북한으로 가고, 남북한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재일조선인들은 한반도를 연결하는 귀한 통로이다. 이들을 주님께서 사용해주시도록 기 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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